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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읽고 싶고 글도 써야겠고

《김약국의 딸들》책 속에 펼쳐지는 평행 우주

by naraola 2022.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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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메로스를 읽고 나서 우리 문학 교과서에 실렸던 소설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제목이건 작품의 분위기이건 한두 마디 문장이건 어렴풋이 떠오르기는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하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이다. 그래서 다시 한번 그 소설들을 읽어보려, 자세를 고쳐 잡았다. 첫 작품이 김약국의 딸들이다.

박경리, 《김약국의 딸들》, 마로니에북스, 2013

 

김약국의 딸들은 시대적으로는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집권 시절부터 일제 점령이 극심했던 시기까지를 배경으로 삼는다. 이처럼 역사적으로는 극도로 혼란하지만 그럼에도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잡초처럼 강인하게 살아내었음을 보여주는 소설들을 나는 사랑한다. 그리고 혼란을 틈타 본모습을 훤히 드러내는 인간의 열 길 속내가 때로는 흉측하고 또 때로는 위대하여 감동하기를 좋아한다. 따라서 이 작품 김약국의 딸들은 내가 다시 읽어보고 싶은 소설 중 가장 첫 순서를 차지했다.

 

미리 말하자면 내가 지금 쓰려고 하는 것은 서평이 아니다. ‘이라는 단어가 필요 없는 소설가이자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몇 해 전 토지를 읽으며 그 섬세한 소설 속 세계와 인물에 대한 통찰에 깊이 빠졌다. 책을 펼치면 그 속에 내가 사는 이 세계와는 동떨어진 새로운 평행우주가 나타나는 느낌이었다. 퇴근하고 토지 읽고 퇴근하고 또 읽고 다 읽는 대로 서점으로 냉큼 달려가서 다음 권 사서 또 읽고... 하는 생활이 당분간 이어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 읽지는 못했다. 10권까지 읽었을 때쯤일까, 자기가 먼저라고 아우성치며 밀고 들어오는 일상의 습격에 정주행을 멈추고 말았다. 이렇듯 나는 이날 여태껏 바쁘다는 핑계나 대며 다 읽지도 못한 소설을 박경리 소설가님은 쓰신 것이다. 굳이 나의 이런 별 볼 일 없는 독서력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소설에 열광하는 수많은 독자와 연구 논문들, 《토지》를 읽기 위해 읽는 다양한 출판물들만 보더라도 그 가치는 충분히 증명된다.

 

토지1969년부터 연재를 시작하여 1994년에 비로소 탈고한 소설인데, 이 책 김약국의 딸들은 토지를 집필하기 전인 1962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토지가 경남 하동을 배경으로 시작한 소설인 반면 김약국의 딸들은 경남 통영을 배경으로 둔다. 삼면 바다인 통영은 마치 삼면 바다인 조선의 축소판인 듯하다. 기울어가는 가세에 무기력하게 침몰하는 김약국과 김약국의 네 딸,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삶을 덤덤하게 읊는다. 소설 속에서 그 삶들은 갸륵하게 흘러간다. 이제 그만하면 됐다 싶은데도 또 기울고 또 피폐해진다. 비극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읽으며 분노와 안타까움에 애가 마른다. 누구를 겨눌 수도 없는 감정은 담담한 문체를 따라가며 가슴속에 꾹꾹 쌓인다. 마치 소설 속 인물들이 절규와 울부짖음을 삼키고 꾸역꾸역 살아내는 모습과 같다. 독자는 그렇게 소설 속에서 한 번의 한 많은 인생을 같이 살아낸다.

 

새삼스레 어휘가 몹시 풍부하다고 감탄하게 된다. 지금과 다른 시대에 쓰인 소설이니 그렇겠다고 치기에는 문체와 표현은 또 세련되었다. 예로, ‘말하다의 표현만 생각날 때마다 메모해보았는데,

 

지껄이다, 뇌까리다, 말끝을 마무르다, 푸듯이 뇌다, 비꼬다, 농 치듯 말하다, 타이르다, 충고하다, 부르다, 말을 걸다, 나무라다, 지껄이다, 불쑥 말을 내밀다, 되풀이하다, 입을 열다, 언성을 높이다, 어르듯 말하다, 웅얼거리다, 왁자지껄 떠들어대다, 넋두리를 하다, 조용히 입을 떼다, 입을 열다......

 

우리는 이렇게나 다양한 방법으로 말을 할 줄 아는 존재들이었고, 소설가는 그것을 놓칠세라 글로 옮겼다. ‘말하다하나만 봐도 이럴진대, 소설 속 표현들이 풍부할 것은 당연지사다.

 

바로 직전에 읽은 소설의 장르가 일본 사소설인지라, 읽으면서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이 작품에도 소설가의 삶이 일부 투영되어 있다. 소설가는 자신의 고향인 통영을 배경으로 삼았고, 소설가 자신의 경험처럼 김약국의 둘째 딸 용빈도 고등교육을 받은 뒤 교사로 재직한다. 그러나 작가의 삶 그 자체만이 소설이 된다면 그 세계는 얼마나 편협할까. 그런 점에서, 책 속에서 평행우주가 펼쳐지는 박경리 소설가의 김약국의 딸들은 어디 비할 데 없이 훌륭하여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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