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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읽고 싶고 글도 써야겠고

《무진기행》의미 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보는 일

by naraola 2022.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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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 《무진기행》, 민음사, 1964(초판)


교과서에서 배운 단편 소설 중에서 졸업하고도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무진기행>이 아닐까. 교과서에 실리는 소설이라는 것이 그렇다. tv 연속극처럼 to be continued 도 아니면서 뒷부분을 댕강 잘라버리거나 앞뒤 내용 무시하고 누가 골랐는지 알 수 없는 중간 부분만 툭 떼어 놓거나. 그래서 그 작품은 읽은 것도 아니고 안 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단편적인 이미지만을 학생들의 머리에 남긴다. 이런 불평할 거면 스스로 책을 사든 도서관을 가든 작품 전체를 읽어봤어야 했으나 그런 열정까지는 또 없었던 나도 나지만.

교과서에 실린 <무진기행>이 내 머릿속에 남긴 것은 ‘무진’이 가공의 도시 이름이라는 사실과 작품 속 그 무진시의 안개가 월출산을 닮았다는 이미지와 수위 높은 성 묘사, 그 정도였다. 이 중에 정답은 무진이 가공의 도시 이름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인간의 기억이란 얼마나 제멋대로인가. 이렇게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 그 사실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

어째서 무진이 월출산을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어디선가 보았던 월출산의 안개 사진이라도 떠올렸을까. 다시 읽은 <무진기행>에는 바닷가가 나온다. 무진이 어느 지역을 모델로 두고 그린 소설이라면 내륙에 위치하는 월출산은 그 후보가 될 수 없는 셈이다. 반면 작가의 고향은 월출산에서 동쪽으로 더 나아가 바다와 접하고 있는 순천이다. 아마도 ‘확신의 무진’상. 물론 어차피 가공의 장소이니 내가 읽으며 월출산을 떠올린다면 월출산이 되는 것이겠지만.

‘수위 높은 성 묘사’라는 기억 역시 잘못되었다. 신성한 문학 교과서에서 살짝 읽었을 때는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자극적이었다는 기억이 있는데 다시 읽어보니 상황 자체는 자극적이나 그렇다고 외설스럽게 묘사하지는 않았다. 예민하고 상상력 풍부한 사춘기 청소년의 기억 왜곡이었던가.

이 책 《무진기행》은 여기까지 짚어본 <무진기행>을 표제작으로 1960년대 김승옥 소설가의 단편 소설 총 10편이 실려있다. 60년대에 지어진 소설들이기 때문에 지닐 수 있는 진정한 레트로의 바이브를 느낄 수 있다. 거기에 감각적인 글솜씨가 더해져 굳이 이미지로 표현해보자면 총천연색 레트로풍의 향연이었던 BTS의 다이너마이트 뮤비를 보는 느낌이랄까. 맛으로 따지자면 새빨간 방울토마토와 꾸덕꾸덕하고 고릿한 치즈를 넣은 뒤 발사믹 드레싱을 끼얹은, 색이 선명하고 새큼한 샐러드 같은 느낌.

 

소설가가 영화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읽어서일까? 소설의 대화문은 마치 이제 막 흑백을 벗고 색을 입은 옛날 한국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이 서로 가까이 다가갈 때 주고받을 법한 티키타카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 글이 쓰인 당시가 실제로 이제 막 컬러 영화가 만들어지려던 시기였으므로 이것은 그 시대 분위기를 내려고 지어낸 것이 아닌, 실제 그 시대의 분위기일 터.

"무진기행"을 각색한 영화 '안개' 소설가가 직접 각색에 참여했다. 사진은 《한국일보》기사에서.


그런가 하면 마치 て로 잇고 잇고 또 이은 일본 소설 속 문장 같은 문장이 보이는 것도 흥미롭다. 긴 문장을 그 흔한 쉼표 하나 없이 이어 나가면서도 의미가 흐트러지지 않는 점에 놀랄 따름이다. 오히려 리듬감마저 느껴진다. 소설가는 이 책의 매 작품 속에서 다양하게 변주하며 마치 곡예를 부리듯 이런 문장을 선보인다.

문체 외에도 소설의 소재와 내용 역시 흥미롭다. <역사>는 하숙생인 주인공이 전에 살던 창신동 하숙집과 친구가 친척집이라며 소개한 새 하숙집의 대조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창신동 집은 벽지 대신 신문이 발리고 천장마저 묘하게 휘어진 하숙집으로, 성명 철학자에게 가서 자기 이름을 보여보고 싶지만 이름을 보자마자 갈보라는 것을 들킬까 두려워 갈지 말지 갈팡질팡하는 영자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선천적인 힘을 주체하지 못하여 매일 밤 동대문에 올라가 돌을 들어 이리저리 옮겨 놓는 서 씨가 살고 있다. 반면 새 하숙집에서는 매일 똑같은 시각에 ‘엘리제를 위하여’ 피아노 연주가 울려 퍼지고 또 정해진 시각에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한 다음 각자 자기 방으로 들어가 스케줄대로 공부한 뒤 잠을 잔다. 환멸을 느낀 주인공이 공부 시간에 기타를 치자 주인 할아버지는 다 함께 미싱을 돌리는 오전 10시로 기타 치는 시간을 배정한다. 주인공은 이런 틀에 박힌 생활양식과 그것을 강요하는 할아버지를 혐오한다.

 

빈껍데기 같은, 그러나 완고한 그 세계에 균열을 내고 싶었던 나는 결국 식구들이 자기 전 마시는 보리차에 흥분제를 타고 다들 잠들어 있기로 약속된 시간에 피아노를 두드린다. 과연 균열은 생겼을까.

<차나 한 잔>은 주인공인 ‘그’의 직업 만화가가 주는 이미지 때문일까.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검정 글씨와 흰 여백의 글일 뿐인데도 다양한 색채가 느껴지는 감각적인 단편이었다. 신문에 매일 연재하던 만화가 하루 이틀 빠지고 실리지 않더니 결국 ‘목 잘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단편의 제목인 <차나 한 잔>은 이제 만화를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문화부장이 주인공에게 하기 위해 꺼낸 말이다. “차나 한잔…” 점입가경으로 주인공은 배탈이 나서 하루 종일 변의가 끓는다. 그런 몸을 이끌고 다음 연재할 신문을 찾는 것인지, 설사를 멈추게 하는 약 ‘크로로마이신’을 파는 약국을 찾는 것인지, 그냥 방황하는 것인지 모를 짧은 로드무비가 펼쳐진다.

1960년대에 쓰이던 어휘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기에 요즘 세상에서 레트로라 불리며 멋스럽다고 여겨지는 매력이 유난히 도드라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크로로마이신, 문화부장, 망가(만화의 일본어), 레지, 심부름하는 계집애, 고슴도치를 닮은 룸펜 청년, 성냥, 변소


그러나 무엇이 그렇게 느끼게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한편으로는 몹시 세련되었다. 덕분에 읽는 내내 즐거웠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공감한 글은 책 가장 첫머리에 나오는, 1980년 ‘작가의 말’이었다. 짤막한 그 글은 머릿속에만 맴돌던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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